<동영상 링크>
<동영상 링크>
읽기자료 ☞ 소로와 간디 |
1.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애 :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 시작된다 |
"만약 대학들이 현명하다면 졸업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졸업장과 더불어, 아니 졸업장 대신 「월든」을 한 권씩 주어 내보낼 것이다." - E. B. 화이트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는 28세 때인 1845년에 친구에게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월든 호숫가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직접 통나무집을 지어놓고 2년 2개월 동안을 살았다. 「월든-숲 속의 생활」은 소로가 숲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겪고 느꼈던 가장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삶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러나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인간은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공간인 자연과 멀어졌으며 더 나아가 자연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소로는 「월든」을 통해 인간이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인간의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문명이 오히려 자연의 보존과 인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편리함으로 포장된 잘못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인간에게 참다운 이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문명을 통해 만들어낸 사회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끝없이 경쟁만 할 뿐, 인간적인 삶과는 너무나도 많이 동떨어져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소로의 「월든」은 지난 150여 년 동안 수많은 사상가와 문필가, 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마하트마 간디는 소로가 주창한 '시민 불복종'운동에서 자신의 '무저항 비폭력'이라는 독립운동 방식을 이끌어냈으며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과 마르셀 푸르스트, 윌리엄 예이츠와 같은 문인들과, 자연주의자인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 역시 그의 통찰력에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토로한다. 또한 최근의 환경운동가들은 「월든」을 최초의 녹색서적으로 평가하며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모델로 삼고 있다. 1817년 7월 12일 미국의 동북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난 소로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콩코드의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인디언이 살던 땅 '콩코드'는 비옥한 토지와 거대한 숲, 강물이 끝없이 이어지는 지역으로, 소로는 그곳에서 경이로운 자연의 법칙과 소중함을 직접 체험하며 자랐다. 미국은 1830년대에 이르러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근대국가로 발돋음하는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833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소로는 그리스ㆍ로마 고전에 심취했으며 영문학은 물론 수사학과 함께 자연사를 공부하며 인디언의 유물들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37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콩코드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단 2주 만에 교단을 떠나게 된 것은 '매질 대신 도덕적 훈계로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그의 소신을 학교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1838년부터 형인 존과 함께 사설학교를 운영했다. 소로는 28세가 되던 해인 1845년 봄에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자연 속의 생활을 위해 월든 호숫가에 정착했다. 그는 월든 숲속에서 보낸 2년 동안 직접 노동을 하고, 독서와 사색을 즐기며, 친구들과 교제하며, 자연을 관찰하며 생활했다. 입을 것과 먹을 것에 집착하지 않고 먹을 만큼만 스스로 경작하여 해결하고 그외의 시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과 교류하는 생활이었다. 세속적인 성공을 거부한 채 숲속의 이모저모를 관찰하기 시작한 그는 서서히 대자연과 동화하기 시작한다. 숲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월든 호수와 그 주변 자연환경에 대한 묘사는 압권이라 할 수 있다. 들꿩과 개미떼와 오리들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함께 드러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흠뻑 빠져든 그는 사색과 독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더욱 굳건히 한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킬 때마다 강이든 숲이든 발길이 닿는 대로 산책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더욱 성숙해졌으며 특유의 문체도 완성되었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 미국의 영토 확장 정책(멕시코 전쟁)에 대한 깊은 불신과 노예제도에 반대했던 그는 1846년 7월에 인두세(人頭稅)의 납부를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1849년 소로는 무정부주의적 견해가 표명되어 있는 연설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후대의 간디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민의 불복종 Civil Disobedience」이다. 또한 그해 8월에 그가 지닌 철학의 진수를 담고 있는 「월든」을 출간했다. 「월든」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년 동안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직접 체험한 자연의 단순한 진리들에 대한 소개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폐결핵에 걸린 이후 물질보다 영혼을 중시하고 육신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죽음이 임박할수록 한층 공고해졌다. 그의 신체는 병마로 약해져 갔지만 정신만은 더욱 더 명료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늘 변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소로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유지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음의 고통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어떤 것들은 끝마치는 것이 당연히 더 좋은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어느 곳 하나 소로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콩코드 마을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기념비다." 현재 소로가 살았던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이 있던 장소에는 그를 기리는 돌무덤 하나가 쌓여 있다. 붉은 돌로 된 그의 묘비에는 이름과 사망한 날짜 이외에는 어떤 글도 새겨져 있지 않다. |
2.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와 사상 |
현대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간디였다. 흔히, 간디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명실 공히 국부(國父)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간디는 아라비아 해에 인접한 인도 서해안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조혼의 지방 관습 때문에 열세 살 때 결혼하였으며, 열아홉 살 때(1888)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엘리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이너템플 법과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곳에서 새로운 문명 생활에 접한 그는 오히려 인도인으로서의 깊은 자각을 느꼈다. 그는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얻고 다시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1894년에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 상사의 고문 변호사로서 근무하였다. 그곳에서 흑인들이 겪어야 하는 신분상의 불이익, 백인들의 횡포 등에 맞서서 매우 열정적으로 일하였다. 그는 20여 년 동안을 남아프리카에 머물면서 특히 인권 옹호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간디는 늘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를 탐독하였다. 신애(信愛), 보시 등을 강조하는 이 민족시에서 그는 언제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잠잘 때 이외에는 잠시도 '바가바드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문학인으로는 톨스토이, 러스킨 등을 특히 좋아하였다. 남아프리카로 건너가던 해인 1894년에 인도인 국민회의를 결성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1895년에는 인두세(人頭稅) 반대 투쟁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도 분열의 원인을 영국의 제국 지배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인들의 지역 감정과 종교적 분쟁에도 간접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인도인들에게는 향토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지만 조국이라는 개념은 희박하였다. 그는 조국에 대한 관념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간디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그 당시 영국은, 만약 인도인들이 이 전쟁에 협력해 준다면 자치를 시켜 주겠다고 공언하였다. 간디는 그 약속을 믿고, 진두에서 인도인들의 단합과 영국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대전이 끝난 후 그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이나 결사(結社) 등을 통제하고, 더욱 강압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전 인도에는 반영(反英) 운동이 일어났다. 간디는 이 전 인도적 민족 운동의 선두에 섰다. 약소 민족의 자결 자주권을 부르짖고,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가 창간한 기관지 Young India는 그와 같은 비판적 언론의 효시였다.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하고, 영국 제품 불매 운동, 물레의 장려, 비폭력 무저항주의 등의 범국민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물레의 장려는 산업화를 반대하는 상징이었다. 즉, 비인간화의 길을 걷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또, 폭력을 없애려고 사용하는 '폭력'에도 그는 반대하였다. 철저한 비폭력으로 무력의 압제를 벗어나게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평소 생활은 극도의 금욕과 절제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이웃에 대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융합적인 태도를 보여서, 그가 지은 수도원의 기도문에는 '힌두 성전'을 비롯하여 '코란', '성경', '불경' 등의 문구를 망라할 정도였다. 1930년 초, 간디는 노령을 이유로 하여 정치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젊은 정치 지도자 네루 등에게 그 자리를 맡긴 채 묵상과 헌신 등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정국은 구심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간디는 다시 민족 운동의 선봉에 서서 나치의 잔학성에 항거할 것을 호소하였다. 동시에 대규모의 반영 투쟁을 전개하면서 명분 없는 싸움의 종식을 주장하였다. 그 때, 의회의 지도자들은 거의 투옥되었으며, 간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옥중에서 간디는 아내를 잃었다(1944).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평화적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그 독립은 파키스탄과 인도를 갈라 놓는 반 쪽의 독립이었다. 인도 북부 지역에는 무슬림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힌두를 선봉하는 남부 인도와는 마찰이 잦았다. 끝내 무슬림의 파키스탄과 힌두의 인도가 분리 독립되었을 때, 그 독립식에 간디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무슬림과 힌두의 융합을 외치면서 인도를 누볐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회색 분자로 낙인이 찍혀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간디는 굴하지 않고 유세를 계속하였다. 간디가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양 종교의 화해를 호소하였을 때, 심한 투석을 만난 적도 있었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저녁 기도를 올리던 중 괴한의 저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힌두, 이슬람의 융합을 반대하는 과격 힌두 교도의 총탄이었다. 그 때 간디의 나이는 79세였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이념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 사상으로 계속되었다. 간디의 사상 중 근간을 이루는 것은 비폭력에 의한 무저항주의이다. 아힘사(Ahimsa)라고 부르는 그의 비폭력주의는 많은 인도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간디는 "비폭력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극한의 완벽성을 갖춘 자기 정화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무력과 남에의 혐오를 폭력으로 다스리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폭력은 반드시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정의를 확보하기는커녕 또다른 피의 복수를 유발시키는 끝없는 윤회일 뿐이다. 간디가 신조로 삼은 비폭력주의는 인간의 상호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그의 비폭력주의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투쟁의 테크닉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완결하려는 휴머니즘의 전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외치면서 '자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1) 참된 자치는 자기 지배, 즉 자기 억제이다. 2) 그 길은 무저항, 즉 영력(靈力) 혹은 애력(愛力)이다. 3) 그 힘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국산품 애용이 필요하다. 4) 우리가 하려는 바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보복하기 위해서 영국인에게 반대함이 아니다. 그렇게 함이 우리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즉, 자치란 결국 각자의 도덕적 책임의 완수이다. 따라서 참된 민주주의는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기회와 편리를 줌으로써 자기완성의 편의를 마련해 주는 데 있는 것이다. 간디의 이와 같은 자치 이념은 도시나 혹은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관념의 유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것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또 큰 저택이 아니라 초가집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농촌 생활의 검소, 소박, 자연 속에서 진실과 비폭력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상징인 소금의 행진” 인간에게 주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의 안락이다. 오히려 지나친 풍요는 인간 정신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이 점에서 네루와 간디는 견해를 달리한다. 네루는 합리적인 계획에 의해 공업화, 산업화를 이루어서 빈곤한 농촌을 개발하고 복리를 누리게 하는 것은 당면의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네루는 전근대적이고 낙후한 인도의 농촌을 근대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과 기술로써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인도의 목표라고 생각하였다. 인도 독립 이후 간디와 네루는 사실상 사상적 결별을 이루었다. 당시의 집권당 국민 의회당은 네루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간디는 네루의 독주에 쐐기를 박는 일종의 압력 정책을 계획하고 있었다. 간디는 네루의 선정권에 가담하지 않는 국민 의회당의 몇몇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단체를 결성하려고 했다. 그것은 첫째, 불가촉 천민(不可觸賤民, Harijan) 제도의 철폐를 위한 단체 둘째, 기초 교육을 보급시키는 단체 셋째, 힌디 어를 국어로 보급하려는 운동 단체 넷째, 물레 생산 보급 단체 다섯째, 봉사의 단체 등이다. 이것은 네루 정권에 대한 간접적 압력 단체였다. 간디는 네루의 공업화 정책에 따르는 비인간화 현상, 그리고 네루의 일당 독재화 등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간디 자신이 분명히 밝혔듯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네루의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자문 단체였을 따름이다. |
시민 불복종에 대하여 |
1. 시민 불복종의 등장 배경 |
① 등장 배경 : 개인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제도나 공권력 또는 정의롭지 못한 법들이 존재할 경우, 이에 대항하기 위해 등장함 ② 소로 위의 글은 소로의 주장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Thoreau, H.D., 1817~1862)가 살던 당시 미국에는 노예제가 있었다. 북부 지역은 생산 기계가 도입되어 노예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노예가 많이 필요한 면화 생산이 주요 산업이던 남부 지역에서는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노예제를 묵인하였다. 그는 노예제를 묵인하는 정부를 지지할 수 없었다. 그는 합법적인 절차로 노예제 폐지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미국 정부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항의의 표시로 납세 능력의 차이에 상관없이 개인에게 똑같이 매기는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는 '국가가 불의한 일을 시민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시민은 그러한 국가의 강요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는 시민 불복종론을 펼쳤다. |
③ 시민 불복종의 사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을 전개한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히피 반문화 운동, 학생 운동 등,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미국과 영국의 시민운동,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 1980년대 우리나라 방송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 위 글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장이다. 1929년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킹 목사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와 경제적 불평등을 보면서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는 신앙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을 꿈꾸며, 예수의 사랑의 가르침에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접합시켰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단순한 평화주의가 아니라 저항은 하되 폭력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백인 기득권층과 정부의 공권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에 있던 흑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이러한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민권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
2. 시민 불복종의 의미 |
① 소로 :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정부 정책을 변혁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의도적인 위법 행위, 시민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규범적 · 윤리적 근거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법을 공개적·의식적으로 위반하는 것 ② 롤스 : 어느 정도 정의로운 민주주의 체제에서 특정한 법률이나 정책 또는 명령이 정의의 원리를 어겼을 경우 이를 알리기 위해 다수자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정치적 행위, 합법적인 민주국가에서의 시민 불복종이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을 설명함 → 억압적인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시민 불복종이 인정될 수 없음 ③ 기본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법을 폐기시키거나 바꾸기 위해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 ④ 명백히 정의롭지 않은 사회 제도가 시행되어 개선의 여지가 매우 적을 경우, 이러한 제도를 따르지 않고 이에 저항하는 비폭력적 시민운동 |
3. 시민 불복종의 정당화 조건 |
법에 대한 시민 불복종은 정의의 이념에 기초하여 법의 정신을 존중할 때에 그 정당성을 갖는다. ① 행위 목적의 정당성 : 자기 이익을 배제하고 정의의 원리를 따른다는 신념 ② 최후의 수단 : 먼저 합법적인 개혁의 방법을 동원하고, 그것이 효과가 없어야 함 ③ 비폭력 : 평화적 방법 사용,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이나 폭력을 수반하는 행동은 시민 불복종과 양립할 수 없다. ④ 처벌 감수 : 부당한 법을 어김으로써 받게 되는 처벌 감수하여 법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에 그 법의 부당성을 호소함 |
4. 세계 시민의 불복종 운동 사례 |
1. [씨애틀 세계무역기구(WTO)회의 반대운동] (한겨레신문 : '뉴라운드' 긴장 고조되는 시애틀. 1999. 11. 29. 월) |
<영화-철학 탐구활동 과제>
☞ 영화 감상 후 QR코드 링크로 영화-철학 심화탐구활동 과제를 제출하세요.
☞ 아래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으시오.
☞ [질문] 시민불복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시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철학보고서 제출기한 연장->8/23 | barambit | 2020.08.15 | 595 |
공지 | 구글 클래스룸 및 온라인 철학교실(철학교과 홈페이지) 이용 안내 [1] | barambit | 2021.02.28 | 782 |
» |
320.시민 불복종
![]() | barambit | 2021.02.25 | 237 |
730 |
201-1.나의 성격 유형 탐색하기
![]() | barambit | 2021.06.18 | 89 |
729 |
321.다양성 개방성
![]() | barambit | 2021.02.25 | 274 |
728 |
322.다수와 소수
![]() | barambit | 2021.02.25 | 188 |
727 |
323.바이러스 팬데믹
![]() | barambit | 2021.02.25 | 170 |
726 |
324.보수와 진보
![]() | barambit | 2021.02.25 | 190 |
725 |
325.민족주의 국가주의
![]() | barambit | 2021.02.25 | 170 |
724 |
401.인간이란1-인간의 본성
![]() | barambit | 2021.02.25 | 198 |
723 |
402.인간이란2-인간다움 악의 문제
![]() | barambit | 2021.02.25 | 239 |
722 |
403.자유 결정론
![]() | barambit | 2021.02.25 | 1051 |
721 |
404.자아실현
![]() | barambit | 2021.02.25 | 197 |
720 |
405.사랑
![]() | barambit | 2021.02.25 | 183 |
719 |
407.행복
![]() | barambit | 2021.02.25 | 192 |
718 |
408.죽음
![]() | barambit | 2021.02.25 | 195 |
717 |
406.기억
![]() | barambit | 2021.02.25 | 157 |
716 |
409.신
![]() | barambit | 2021.02.25 | 185 |
715 |
410.우연과 필연 세상 놀라움의 연속
![]() | barambit | 2021.02.25 | 186 |
714 |
411.아름다움 예술
![]() | barambit | 2021.02.25 | 192 |
713 |
412.정의
![]() | barambit | 2021.02.25 | 188 |
712 |
413.평등 차별
![]() | barambit | 2021.02.25 | 182 |